# 영화를 본 뒤, 피해자, 가해자, 죄인, 희생자의 개념에 대해 다시 고민해 봤다. 보통 가해자=죄인, 피해자=희생자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곧 죄인과 동격이 되지 않기도 하는 곳이 ‘사람 사는 곳’인가 보다. 어쩌면 상식이라는 건 실체가 없는,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을 보는 우리의 믿음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공주의 전 학교 선생님은 영화 초반, 중국집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공주야, 너 잘못 안한 거 다 알아. 근데 그게 아니야”.
잘못이란 말에 얼어붙은 공주 앞에서, 선생님은 짬뽕을 후루룩 먹으며 또 말한다.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데서는 잘못 했다고 죄인이고 잘못 안했다고 아닌게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잘못을 했는데 죄인이 아니고 잘못을 안했는데 안 한게 아니라니. 이건 무슨 부조리일까.
논리에도 맞지 않는 이 말이 영화 내내 맴돈다. 그리고 끝내는 이 부조리가 완벽히 이해된다. 그 점이 참으로 슬펐다.
# 공주에 대한 직접적 가해자가 아닌 주변 인물들도 부조리의 한가운데 놓여 있긴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어머니, 공주 엄마, 편의점 김사장, 동윤이, 새로 전학간 학교의 친구들...이들의 무신경한 언사, 무관심, 침묵 또는 지나친 호의는 그대로 공주에게 생채기가 됐다. 아마 이들 행동의 대상이 공주 아닌 다른 아이였다면 그저 약간의 관심 혹은 무관심에 그쳤을 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를 간신히 방어하고 있던 공주에겐 날카로운 비수가 됐다. 주변 사람들은 공주가 겪어온 일련의 과정을 몰랐다. 공주가 남들보다 더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무지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공주가 받은 상처는 현실로 남았고, 주변 인물들은 비자발적 공범자가 됐다.
공주를 성적으로 유린한 인물들은 철저한 자각과 의도를 갖고 가해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의 법칙이 뭔지, 그들은 죄인이 되지 않았다. 공주 주변에서 2차적으로 공주에게 상처를 입힌 인물들은 애초에 그럴 의도와 자각마저 없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공주의 상처를 책임지는 사람은 공주 말고는 아무도 없게 됐다. 세상의 법칙이 부조리였다.
# (결말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렇게 ‘사람 사는 곳’에서 죄와 죄의 출처가 모호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세상의 지독함은 결국 공주를 막다른 길로 몰아 넣었고, 난 영화를 몇번이나 돌려봤다. 솔직히 공주가 결국 구원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공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일상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썼고 그런 공주를 너무나도 응원하고 싶지만, 그녀의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에 공주가 강물에 몸을 던진 뒤 서서히 헤엄치는 장면은 일종의 열린 결말이다. ‘물에 빠지면 죽어서, 마지막 순간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던 공주가 죽지 않고 힘차게 헤엄쳐 나오는 희망적인 결말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공주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물살에 휩쓸려 가는 게 그녀의 마지막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수진 감독은 시나리오에서부터 공주가 살아남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결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공주가 떠내려간 게 끝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논리와 이성, 시스템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어두운 심연-선의와 악의가 끝 모를 듯 모호해지는 이 엄청난 곳에서 공주를 구원할 수 있는 게 오로지 그녀 본인의 생명력 뿐이라면 그것 역시 너무나 처절해서다. 영화 엔딩에 깔린, 공주의 25m 풀장 완주를 응원하는 듯한 함성 소리를 나 또한 공주에게 보내주고 싶었지만...상처 입은 자를 아무도 보듬어 주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 치유마저도 당사자 혼자 죽을 힘을 다해야 겨우 얻어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그녀가 이런 현실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더 자유로워지길 바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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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생기면 늘 집어드는 영화 두 편, <레이첼 결혼하다(2008), 조나단 드미>와 <걸어도 걸어도(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다. 이 때 나의 갈증이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싶다’라기 보다는 좀 더 복잡 미묘한 감정이고,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라는 장르가 환기하는 가족애 따위를 향한 갈증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컨대 내가족이 미울 때, 내 가족을 못 견딜 것 같을 때 혹은 내 가족을 향한 나의 이기심을 확인(?)하고 싶을 때 이 두 영화를 꺼내든다.
# <레이첼 결혼하다>는 문제아 동생 킴(앤 해서웨이)이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나오는 날부터 시작된다. 킴은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반갑게 정을 나누며 언니의 결혼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진다. 서로를 극진히 아끼는 네 식구,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과 보살핌만이 존재하는 화목한 가족이지만 킴은 계속 왠지 모르게 가족들이 불편하다. 가족들은 그런 킴을 보며 또 안타까워 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새 결혼 날짜는 다가온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내 안에도 있던 비밀한 감정을 들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내 가족이 밉다’라는 감정을. 이상하게 이따금 가족이 ‘견딜 수 없이 밉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말 막장 드라마처럼 그들이 말 그대로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드라마처럼 극적인 갈등이나 신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잔잔한 호수 표면 위에 대수롭지 않은 돌멩이 하나가 파장을 일으키듯, 오히려 가족 안에선 늘 말도 안되게 사소한 것 가지고 상처 입고 상처 입히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난 뜨악해 했다. 가족이란 ‘좋다, 밉다’라는 가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숭고한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자기 검열적인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기적인 존재다. 이 근본적인 욕망이 가장 극적으로 도전 받는 장소가 바로 가족 안일 것이다. '혈연'이라는 존재에는 으레껏 대가 없는 사랑과 배려가 전제 돼있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이 같은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가족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이것이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인지 인간의 본능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가족애’라는 것의 실체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레이첼은 자신의 결혼식 하루만큼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싶다는 소박한 이기심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결혼식인데도 사람들의 관심과 신경은 동생 킴에게만 몰려 있는 상황 가운데, 레이첼은 동생을 미워하기에 이르는 자신의 마음을 계속 다잡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반면에 킴은 자신이 ‘관심사병’이 돼서 온 가족들의 친절에 시달리고 있다는 본인 위주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9개월만에 만난 이 두 자매의 충돌은 예상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충돌의 폭발력은 상당히 컸다.
# <걸어도 걸어도> 역시 같은 의미에서 종종 ‘섬찟’한 느낌을 자아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이 어땠는지야 알 도리 없지만, 그는 네 식구에 불과한 한 가족 안에도 벽장 속을 다 채우고 남을 만큼 수많은 비밀한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인터뷰를 봤다. 이 영화를 만들기 얼마 전,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이 영화에서도 가족이란 존재는 ‘가족이라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존재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내가 가장 많은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고작 몇명 되지 않는 내 가족들이다. 료타 역시 되도록이면 고향의 부모님 집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보통 연례 행사로 얼굴만 비치면 그의 할 일은 다 한 셈이 되곤 하는데, 으레 한 번 있는 그 방문에서도 상처의 파편들은 불쑥불쑥 날아든다. 예컨대 전남편과 사별하고 료타와 결혼한 새 며느리를 두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중고’라 칭하는 어머니, 본인이 듣기에 거북한 이야기가 펼쳐지면 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엄마 속도 모르고 친정에 얹혀 살 궁리만 하는 딸. 이들 사이에서 상처의 파편들은 기척도 없이 집 안을 유영한다.
특히 어머니(키키 키린)는 이 가족 안에 쌓인 것들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다. 어머니는 늘 인자하고 헌신적으로 나머지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고 간식을 만들지만,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는 수십년 간 쌓여온 고통이 있다. 큰아들의 죽음,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세월이 흐른 지금 너무도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한 가족의 ‘어머니’는 오늘의 이 표정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 그 고통들을 삼키고 소화해 냈을까. 정적인 카메라에 담긴 집 안의 풍경에서는 때때로 탁하고 무거운 공기의 질감까지 전해진다.
# 두 영화의 가족들은 모두 서로 간의 오해나 원망 또는 해묵은 갈등을 풀고 ‘보다 더 화목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전혀’다. 그건 현실이 아닐 것이다. 이들 가족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냉탕과 온탕을 오고갈 것이다. 가족이란 그런 거니까. 널 미워하는 나 자신을 자책하게 만드는 동생으로 인해(레이첼), 자식을 원망하는 나 자신을 벌 주고 싶게 만드는 딸로 인해(레이첼과 킴의 엄마), 레이첼의 결혼식은 끝나지 않고 계속될 거다. 료타 엄마가 남편의 외도를 마음에 수도 없이 아로 새기듯 틀어두던 노래 ‘걸어도 걸어도’ 또한 끝나지 않고 울려 퍼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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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휴가철이 됐다. 다들 지난 해 휴가가 끝나자마자 계획에 착수했던 올해의 휴가지로 떠난다. 누구는 런던, 누구는 바르셀로나, 누구는 뉴욕...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은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내는 황홀한 시간들로 가득해졌다. 문득 잠 안 오는 밤 그 황홀함을 방 구석에서나마 공유하고 싶어졌다. 내가 보고 싶은 뉴욕을 보기 위해 아주 오래 전에 봤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꺼내 들었다.
불을 끈 어두운 방안에 오드리 햅번의 황홀한 뉴욕이 펼쳐진다. 다시금 왜 <가십걸>의 블레어가 그렇게 <티파니...>의 오드리 햅번에 ‘빙의’하려고 애썼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인격체가 또 있을까. 그녀의 뉴욕은 또 왜 이리 달콤한가. 그런 와중에 그곳의 현실은 또 어찌 그리 현실적인지.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위안을 얻는다. 언제 봐도 꿀잼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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