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판타지’ 영화였다. 그것도 슬프면서 아름다운 동화였다. 영화 내용은 사실상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한 모금 마시면 정신줄을 놓고 과거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차(tea)가 있다거나, 평범한 공동주택의 방 안에 정원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기이하긴 하나 아예 비현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상상과 환상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잠시 현실에서 발을 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냥 동화가 아니라 ‘잔혹 동화’다. 영화를 보기 전 홍보카피나 포스터만 보고 이 영화가 무지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류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오해’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포스터부터 일러스트처럼 귀여웠으니까.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느긋했던 마음은 바짝 긴장. 첫 장면부터 웬 남성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다가오더니 관객을 향해 목젖이 보일만큼 괴성을 지른다. 주인공 폴(귀욤 고익스)은 눈가가 시뻘개서 만사 피곤에 쩔어 보이고, 그의 이모들은 언제나 소름끼칠만큼 빈틈없는 쌍둥이 룩(look)을 고수한다. 현실은 현실인데 여기저기 조금씩 삐딱하게 뒤틀려있다. 그냥 평범한 동화가 아니었던 거다.
드디어 프루스트 부인(앤 르니)의 정원이 공개된다. 헌데 이 정원, 보기만 해도 예쁜 디저트의 달달한 향이 풍겨올 것만 같은 그런 꽃밭과는 거리가 멀다. 한 뙈기밖에 안될 질척거리는 흙밭에 정체모를 식물들이 자라는 요상한 곳이다. 심지어 이 흙밭이 가꿔지는 장소는 도심 속 공동 아파트의 방 안. 볕 안 드는 두더지굴 같은 곳에서 식물을 키우느라 방 안 곳곳에는 괴기스럽게 햇빛 반사용 거울을 설치해놨다. ‘마담’이나 ‘정원’에 어울릴만한 고상한 장식품 대신 일관성 없는 취향의 박제 동물 머리나 불상 따위만 가득하다. 말하자면 이 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자기 집 안에 ‘마약 재배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차저차하여 이제 신용하기 살짝 꺼림직한 이곳에서 기억 여행이 펼쳐진다.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기억을 불러일으킬 음악을 틀고 차 한 모금에 마들렌 한 입을 베어무는 순간, 이 비밀한 공간은 거꾸로 흐르는 몇십 년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프루스트 부인의 정원에서 내가 오늘, 지금 이 순간 알고 있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은 마치 골동품 가게처럼, 흘러간 마음과 가려져 있는 진실을 먼지 구덩이에서 꺼내 올리는 그런 곳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때로 잠자고 있던 아름다운 추억을 만나고, 때로 영원히 지우고 싶었던 아픈 기억을 맞닥뜨린다. 이들의 무의식 속 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시각적인 감상을 넘어서 어디선가 시큼비릿 쌉쌀한(?) 정체모를 풀냄새가 코끝에 끼쳐오는 것만 같다.
폴도 결국 기억 속에 묻어두고 외면하려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그와 화해한다. 평생 이모들이 설계한 대로 인생을 살아왔던 폴은 이제 자신이 피아노를 사랑하는 이유가 이모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서 참가한 콩쿨에서, 폴은 마치 눈 앞의 세계가 산산이 ‘깨지는 것 같이’ 환각적이고 폭발적인 연주를 해낸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매듭이 풀릴 때는 위기도 겪는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딛고 일어선다. 폴에게 있어서 과거와 마주하는 것은 곧 잃었던 자기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 주는 메시지는 심플하다. 자신의 과거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 지나온 세월을 원망하는 사람들, 그리고 과거와 화해하지 못해 앞으로도 뒤로도 발을 내딛지 못하고 쳇바퀴 돌리듯이 오늘만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능동적인 형태의 ‘힐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약(?) 탄 차와 마들렌이라는 판타지적인 소재를 통해 이를 심플하게 가능케 한다.
여기까지는 동화적이다. 허나 영화가 내포하는 의미는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프루스트 부인의 정원에서는 30유로만 내면 기억 여행을 떠날 수 있겠지만, 어디 현실에서야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기가 쉬운 일일까. 하물며 영화 속에서도 이를 이루지 못한채 주변인이 돼버린 사람들을 보여준다(예컨대 폴의 아빠 친구). 바꿔 말하면, 영화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마약 탄 차와 마들렌이라는 우연적이고 판타지적인 매개체가 없이는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 볼 기회를 얻기 힘들다는 얘기다. 또 과거를 마주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 결과가 해피엔딩이란 보장은 없다. 기억을 불러내는 과정과 결과는 심지어 괴롭고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과거를 돌이켜보기로 결심했다면, 후폭풍도 본인이 감당할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화해하는 과정은 종종 외롭고 후회스러울지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도 이따금 쉽게 히스테릭해지고, 피폐해지고, 집착적으로 변한다. 이들 모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가 얼마나 분열적이며 화해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화해나 치유 같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삶 속에 가려져 있는 어둠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시청각, 후각을 다채롭게 만족시키는 이 환상같은 영화가, 종종 슬프고 잔혹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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