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의존증인 아들, 남편, 아버지가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가정의 불화, 끔찍한 유년기,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것들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고정관념을 가볍게 뛰어 넘어 한 차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엉뚱하고 심플하지만 따뜻했던 <술이 깨면 집에 가자(Wandering Home, 2010), 히가시 요이치>. 심각한 알코올의존증인 츠카하라 야스유키(아사노 타다노부)가 짧고 굵게 내뱉는 한 마디 말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제 술 끊고 집에 가자’.
영화는 생각보다 독특했다. 특히 츠카하라의 가족들은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 도입부에서 츠카하라의 어머니는 술을 마시다가 장렬하게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에게 ‘죽을 거면 가족 없는 데 가서 죽으라’고 말한다. 헌데 모자 사이에서 이 말은 마치 ‘빨래 정돈 네가 스스로 개라’ 정도의 가벼운 잔소리처럼 소화된다. 아직 영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모자의 사이는 원만해 보이고, 대사에 악의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대체 이 가족은 뭘까.
그 직후 츠카하라의 가족이 등장한다. 아내인 유키(나가사쿠 히로미)와 어린 아들, 딸이 병문안을 온 것.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이번에야말로 골로 갈 뻔 했네’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아빠의 소변주머니를 가지고 해맑게 장난을 친다. 아내는 츠카하라에게 진심 어린 키스를 해주고 병원을 떠난다. 도대체 이 가족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남은 영화가 심히 궁금해졌다.
게다가 감독은 알코올의존증으로 엉망진창인 츠카하라를 마냥 ‘나쁜 놈’으로 그려 놓지 않았다. 동시에 특별히 절망적이거나 막막한 인생으로 그려 놓지도 않았다. 그가 정신병원 알코올병동에 입원하기까지 가족들의 서포트,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는 소소한 입원 생활 등은 츠카하라가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임을 알게 해준다. 츠카하라를 포함해 알코올의존증으로 입원 중인 영화 속 환자들 모두 똑같다. 이들은 결코 문제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희화화되지도 않는다. 비참함이나 우울함의 매개체로 소비되지도 않는다. 당췌 코믹 영화인지 가족 휴먼드라마인지 종잡을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영화를 빽빽하게 흥미롭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아내 유키의 감정선은 러닝타임 내내 무척 복잡미묘하다. 하지만 영화는 딱히 이렇다 할 부연 설명 없이 절제된 묘사로만 그녀의 심경을 어림짐작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술에 취해 이따금 폭력까지 휘두르던 전남편(그렇다, 이들은 심지어 이혼한 상태다) 츠카하라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헌신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를 계속 봐 나가며, 나는 천천히 조금씩 유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장면에서 그녀는 의사에게 ‘슬픔과 기쁨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며 담담히 속내를 고백한다. 평소엔 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게끔 쿨한 유머로 너스레를 떤다. 영화 속 시간보다 더 앞선 과거의 결혼 생활이 어땠을지 어렴풋이 짐작되는 대목들이다. 아마도 그녀는 술에 취한 남편 옆에서 내내 외로웠을 것이다. 그녀는 둘의 아이들을 위해 강해졌을 것이며, 이혼을 결정하며 츠카하라를 포기했을 것이다. 전남편에 대한 기대를 다 접고, 이제 더이상 실망하고 미워할 일도 없어졌을 것이다. 현실의 문제들을 걷어내자, 유키에게 츠카하라는 그녀 삶의 ‘빈 구멍’이자 그리움으로 오롯이 남았다. 츠카하라에게 유키와 아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런 유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터뜨리는 장면이 있다. 츠카하라의 망가진 건강이 나날이 악화되면서 그를 돌보는 일도 힘들어졌을 때다. 그녀는 결국 아무도 보지 않는 부엌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자신의 삶에서 츠카하라를 비워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시작되는 그와의 시간은 여러 모로 버겁고 혼란스러울 법 하다. 그런 엄마를 몰래 바라보는 두 아이들의 눈망울엔 맑은 슬픔이 어린다.
하지만 마지막 온 가족의 바다 여행 순간, 츠카하라와 유키는 둘 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아이들과 함께 찾은 바다, 츠카하라는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유키의 눈에 진짜 츠카하라가 있는 쪽과 정반대편 방향에 나타난 그의 영혼(?)이 보인다. 그의 영혼(감독은 은유 따위 버리고 말 그대로 ‘영혼’을 등장시킨다)일지 유키의 환시일지 모를 또 다른 츠카하라는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뿅’ 사라진다.
유키의 눈에 츠카하라의 영혼이 떠나가는 모습이 보인 건, 아마 그동안 츠카하라에게 귀신 처럼 씌여 있었던 지긋지긋한 무언가가 마침내 해소됐다고 느꼈기 때문 아닐까. 츠카하라가 매일 꾸던 꿈처럼 그를 초조하게 만들던 그 무엇 말이다.
알코올의존증이나 우울증 같이 드러나는 문제를 안고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 모두 삶의 ‘빈 구멍’을 하나 둘쯤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깨진 독에 누군가는 돈을 붓고 누군가는 사랑을 붓고 누군가는 술을 부을 뿐. 영화는 술이 깨면 돌아가고픈 곳을 ‘집’으로 표현했지만, 결국 삶에 필요한 가장 최소한도의 따뜻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싶다. 입원 중인 츠카하라는 매일 맛있는 카레가 저녁 메뉴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일희일비한다. 때때로 우리에겐 너무나 좋아하는 카레의 맛있는 냄새가 가장 충만한 행복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술이 깨면 집에 가자>고 경쾌하게 제안하는 이 영화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간에, 누구나 자신의 깨진 빈 틈도 인정하고 보듬어 줄 따스함을 갖고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순수하고 확고하게 희망적으로.
- 영화는 기본적으로 무척 직관적이다. 예컨대 술에 잔뜩 취한 츠카하라의 상태를 표현할 때, 그의 눈 앞에 환시가 보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아예 실제로 조악한 분장을 한 츠카하라를 '환시'로서 등장시키는 식이다.
- 히가시 요이치 감독은 <그림 속 나의 마을>로 1995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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