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왜 이리 평이 안 좋은지 모르겠지만, 난 2시간 내내 배꼽을 잡으면서 봤다. 아무래도 <숲 속으로(In to the woods)>는 예쁘고 귀엽고 훈내 나는 정통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거리가 멀다. 이런 걸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좀 놀랐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2시간 내내 실망감에 젖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숲 속으로>는 한 마디로 병맛과 개드립을 난사하는 ‘블랙 디즈니’이자 막장 애니메이션이다. 따라서 그냥 그렇게 즐기면 된다. 숲 속 영상은 환상적이고, 브로드웨이 원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만큼 음악적 매력이 풍부하다. 메릴 스트립, 조니 뎁 뿐 아니라 노래 잘 하기로 소문난 에밀리 블런트, 제임스 코든, 안나 켄드릭, 크리스 파인 등 주연들이 부르는 위트 있는 넘버들은 완성도가 높고 귀를 즐겁게 한다. 빨간 모자 역을 맡은 어린 릴라 크로포드의 야무진 표정과 음색도 압권이다.
<숲 속으로>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으로 유명한 스티븐 손드하임의 동명 뮤지컬이 원작이다. 유튜브에서 뮤지컬 영상을 찾아보면, 캐릭터나 뮤지컬 넘버 연출에 있어서 영화가 꽤 충실하게 무대를 복기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익히 알려진대로 유명한 동화들의 복합체(신데렐라, 잭과 콩나무, 빨간 모자, 라푼젤 등)다. 하지만 유명 동화 속 주인공들의 인연은 우연적이고 절묘하게 엮이면서 전혀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헌데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병캐(병맛 캐릭터)’다. 신데렐라, 잭, 빵집 부부, 마녀, 왕자 등 너나 할 것 없이 ‘병맛력’을 뽐내는데, 디즈니가 마치 이번만큼은 제대로 막 나가 보겠다고 작정한 듯 보일 정도다. 엄마한테 맨날 머리통을 야무지게 ‘후려 맞는’(이렇게 표현함이 적절하다) 잭, 우유부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달리는 신데렐라, 마녀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겨우겨우 구한 소를 어처구니 없이 잃어버리는 빵집 부부의 허무 개그 등 등장 인물들은 모두 원작 동화와 달리 조금씩 비틀려 있다.
예컨대 신데렐라가 자정 전에 파티를 빠져나오다가 유리 구두를 흘린 원작 동화의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숲 속으로>는 이런 대목에 집요하게 의문을 던진다. 만약 신데렐라가 결단력 제로의 인물이라면? 결국 <숲 속으로>는 신데렐라를 사흘 내내 왕자랑 춤만 잘 추다가 밤만 되면 급 도망치는 결정 장애 인물로 꼬아 놓고, 왕자는 그런 신데렐라를 잡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는 과도한 열정남으로 만들어 놨다. 마지막으로 도망치던 중 신데렐라의 머릿속에선 몇초간 슬로우 모션으로 약삭 빠른 계산이 오고 간다. 구두를 벗고 뛰어? 아님 그냥 왕자한테 못이기는 척 잡혀봐? 그러다가 이 신데렐라는 ‘일단 도망은 치되, 보험으로 구두 한 짝만 두고 가지 뭐’라는 심정으로 구두를 벗어 둔 채 맨발로 도망가는 것이다. 이렇게 <숲 속으로>는 원작 동화를 B급 패러디물로 재구성하는 데 목적을 둔 듯하다. 등장 인물들은 전부 매우 어처구니 없이 죽거나 사고 당하거나 서로 눈이 맞는다(?). 전형적인 막장 코드다.
하지만 동화 아닌 현실에서 이별과 죽음, 배신과 속임수는 종종 어처구니 없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영화를 ‘동화 속 주인공들이 선사하는 올 연말 최고의 선물’ 같은 말로 설명해선 안된다. 적어도 <숲 속으로>는 최대한 예쁘고 완벽한 동화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 영화의 '숲'은 현실 속 모순들만 극대화해 담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영화의 결말도 동화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모든 악이 격퇴되고 험난한 사랑은 이뤄지며 기억에 남을만한 엔딩 넘버로 막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숲 속으로>는 여전히 아직 어두컴컴한 숲 속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홀로 남은 인물들을 조용히 모으며 끝을 낸다. 영화가 시작할 때는 서로 전혀 남남이었던 이 원작 동화 속의 전설적 주인공들이 이제 이곳에서 자연스레 제2의 가족이 된다. 2시간여의 모험은 동화 속 주인공들로 하여금 크나큰 상실을 겪게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남은 이들은 연대하게 했다. <숲 속으로>의 숲은 신비한 마법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현실의 ‘상실’까지 말끔히 해제하는 동화적인 마법은 과감히 사양했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끝간데 모를 개그와 충실한 병맛 드립을 실컷 즐겼고, 사랑스러운 동화 속 숲 대신 현실의 욕망을 반영하는 숲을 지어낸 롭 마샬 감독의 선택을 즐겼다. 친절하고 잔인하지 않게 교훈을 전달하는 영화를 기대한다면 그런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인 관객으로선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 롭 마샬 감독은 역시 뮤지컬 원작인 영화 <시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뮤지컬 원작자인 스티븐 손드하임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스위니 토드> 등으로 유명한 작사/작곡가다.
- 조니 뎁을 보러 오려는 관객이라면...그의 분량은 매우 적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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