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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7. 21:00

이 영화가 왜 이리 평이 안 좋은지 모르겠지만, 난 2시간 내내 배꼽을 잡으면서 봤다. 아무래도 <숲 속으로(In to the woods)>는 예쁘고 귀엽고 훈내 나는 정통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거리가 멀다. 이런 걸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좀 놀랐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2시간 내내 실망감에 젖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숲 속으로>는 한 마디로 병맛과 개드립을 난사하는 ‘블랙 디즈니’이자 막장 애니메이션이다. 따라서 그냥 그렇게 즐기면 된다. 숲 속 영상은 환상적이고, 브로드웨이 원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만큼 음악적 매력이 풍부하다. 메릴 스트립, 조니 뎁 뿐 아니라 노래 잘 하기로 소문난 에밀리 블런트, 제임스 코든, 안나 켄드릭, 크리스 파인 등 주연들이 부르는 위트 있는 넘버들은 완성도가 높고 귀를 즐겁게 한다. 빨간 모자 역을 맡은 어린 릴라 크로포드의 야무진 표정과 음색도 압권이다. 





<숲 속으로>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으로 유명한 스티븐 손드하임의 동명 뮤지컬이 원작이다. 유튜브에서 뮤지컬 영상을 찾아보면, 캐릭터나 뮤지컬 넘버 연출에 있어서 영화가 꽤 충실하게 무대를 복기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익히 알려진대로 유명한 동화들의 복합체(신데렐라, 잭과 콩나무, 빨간 모자, 라푼젤 등)다. 하지만 유명 동화 속 주인공들의 인연은 우연적이고 절묘하게 엮이면서 전혀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헌데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병캐(병맛 캐릭터)’다. 신데렐라, 잭, 빵집 부부, 마녀, 왕자 등 너나 할 것 없이 ‘병맛력’을 뽐내는데, 디즈니가 마치 이번만큼은 제대로 막 나가 보겠다고 작정한 듯 보일 정도다. 엄마한테 맨날 머리통을 야무지게 ‘후려 맞는’(이렇게 표현함이 적절하다) 잭, 우유부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달리는 신데렐라, 마녀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겨우겨우 구한 소를 어처구니 없이 잃어버리는 빵집 부부의 허무 개그 등 등장 인물들은 모두 원작 동화와 달리 조금씩 비틀려 있다.


예컨대 신데렐라가 자정 전에 파티를 빠져나오다가 유리 구두를 흘린 원작 동화의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숲 속으로>는 이런 대목에 집요하게 의문을 던진다. 만약 신데렐라가 결단력 제로의 인물이라면? 결국 <숲 속으로>는 신데렐라를 사흘 내내 왕자랑 춤만 잘 추다가 밤만 되면 급 도망치는 결정 장애 인물로 꼬아 놓고, 왕자는 그런 신데렐라를 잡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는 과도한 열정남으로 만들어 놨다. 마지막으로 도망치던 중 신데렐라의 머릿속에선 몇초간 슬로우 모션으로 약삭 빠른 계산이 오고 간다. 구두를 벗고 뛰어? 아님 그냥 왕자한테 못이기는 척 잡혀봐? 그러다가 이 신데렐라는 ‘일단 도망은 치되, 보험으로 구두 한 짝만 두고 가지 뭐’라는 심정으로 구두를 벗어 둔 채 맨발로 도망가는 것이다. 이렇게 <숲 속으로>는 원작 동화를 B급 패러디물로 재구성하는 데 목적을 둔 듯하다. 등장 인물들은 전부 매우 어처구니 없이 죽거나 사고 당하거나 서로 눈이 맞는다(?). 전형적인 막장 코드다.



하지만 동화 아닌 현실에서 이별과 죽음, 배신과 속임수는 종종 어처구니 없이 발생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영화를  ‘동화 속 주인공들이 선사하는 올 연말 최고의 선물’ 같은 말로 설명해선 안된다. 적어도 <숲 속으로>는 최대한 예쁘고 완벽한 동화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 영화의 '숲'은 현실 속 모순들만 극대화해 담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영화의 결말도 동화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모든 악이 격퇴되고 험난한 사랑은 이뤄지며 기억에 남을만한 엔딩 넘버로 막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숲 속으로>는 여전히 아직 어두컴컴한 숲 속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홀로 남은 인물들을 조용히 모으며 끝을 낸다. 영화가 시작할 때는 서로 전혀 남남이었던 이 원작 동화 속의 전설적 주인공들이 이제 이곳에서 자연스레 제2의 가족이 된다. 2시간여의 모험은 동화 속 주인공들로 하여금 크나큰 상실을 겪게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남은 이들은 연대하게 했다. <숲 속으로>의 숲은 신비한 마법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현실의 ‘상실’까지 말끔히 해제하는 동화적인 마법은 과감히 사양했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끝간데 모를 개그와 충실한 병맛 드립을 실컷 즐겼고, 사랑스러운 동화 속 숲 대신 현실의 욕망을 반영하는 숲을 지어낸 롭 마샬 감독의 선택을 즐겼다. 친절하고 잔인하지 않게 교훈을 전달하는 영화를 기대한다면 그런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인 관객으로선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 롭 마샬 감독은 역시 뮤지컬 원작인 영화 <시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뮤지컬 원작자인 스티븐 손드하임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스위니 토드> 등으로 유명한 작사/작곡가다.

- 조니 뎁을 보러 오려는 관객이라면...그의 분량은 매우 적다는.

2014. 12. 22. 17:36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딱 지금 이 순간까지 쌓인 ‘과거’일 것이라는. 만약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또 1시간, 하루, 1년이 더해진다면 딱 그만큼의 설명이 내 인생에 덧붙여질 것이다.


내게 이 영화는 전적으로 마리아(줄리엣 비노쉬)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조앤(클로이 모레츠)의 비중 및 무게감이 결코 뒤지지 않는데도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이야기는, 마리아가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에서 젊은 여비서 시그리드에게 반하는 중년 여성 헬레나를 끝내 어떻게 연기해내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상의 여배우 마리아는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헬레나 역을 맡게 된다. 하지만 20여년 전 그녀는 같은 연극의 시그리드 역할로 데뷔를 했었다. 이제 그녀는 나이가 들어 극 중 헬레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사회적 지위도 갖춘 헬레나와 현실의 마리아는 마치 거울을 보듯 흡사하다. 이들이 일궈낸 것들은 당장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시간을 들여 갈고 닦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있다. 그런 헬레나가 고작 한 여자 아이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저버린다. 한 순간에 우습고 유치한 꼴로 전락한다. 마리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위스 실스마리아의 산 속에서 연극 연습을 하면서도 마리아는 계속 대사를 잊어

버리거나 씬에 동의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헬레나의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마리아를 물심양면 보좌하는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이 있다. 그녀는 젊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아직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설명할만한 퍼즐 조각들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 발렌틴에게 삶이란 아직 ‘저 앞에 놓여있는 무언가’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부딪쳐도 봐야 한다. 예컨대 썸 타는 사진가가 꾸준히 만나볼만큼 괜찮은 남자인지도, 토 나올만큼 구불구불한 산 속 안갯길을 달려가 만나보고서 판단해야 된다. 아직 그녀는 그러고 싶은 나이인 것이다.





이 둘의 방향이 영화 내내 계속 엇갈린다. 중년의 마리아는 계속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반면에 발렌틴은 세상의 방식을 기다린다. 그러다 보니 이 둘은 사소한 일로 계속 충돌한다. 연극 연습 장면을 보고 있다 보면 발렌틴이 시그리드가 되고 마리아는 헬레나가 된다. 또 발렌틴은 지나간 과거 언젠가의 마리아를 재생하기도 한다. 인물과 시점은 한데 뒤섞이고, 영화는 매우 재미있는 리듬감을 갖춘다.





‘이 연극 때려 치우겠다’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마리아는 결국 헬레나를 연기할 수 있을 까?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마리아가 종국에 헬레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깨달음의 계기를 후반부에 두 번 마련했다.


첫 번째는 발렌틴이 말로야 언덕에서 안개처럼 갑자기 마리아의 곁을 떠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1차로 마리아 삶의 관성이 깨지게 된다. 하지만 마리아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마리아는 발렌틴의 빈 자리로 인한 공허함이나 변화를 추호도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하던 대로의 일상을 이어나간다. 새 비서를 고용하고 연극 출연도 그만두지 않는다.

두 번째 계기가 온다. 연극 개막을 앞둔 며칠 전 리허설에서, 영화는 마리아를 결정적으로 가격한다. 시그리드 역을 맡은 조앤에게 “이 장면에서 헬레나가 시그리드보다 몇 초라도 더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가 말 그대로 ‘개무시’를 당하게 만든 것이다. 우월함과 기품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은 오히려 더 극적으로 그녀를 우습게 보이게 만든다. (그 교묘한 뉘앙스와 분위기를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는 최고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야 마리아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진다. 왜 발렌틴이 말로야 언덕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왜 헬레나를 연기하는 것이 그토록 역겹고 짜증났는지. 그녀는 지나간 자신의 시간 속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마리아는 헬레나를 받아들인다. 지난한 연습의 시간을 지나 이 지점에서 말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헬레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가 아예 헬레나를 이해하길 거부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영화는 끝이 난다. 난 엔딩 이후의 시간 속에서 마리아가 헬레나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연기했으리라 믿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종 우리는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대신 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 영화 자체 내용만큼이나 여배우 3인방의 연기도 작품에 큰 몫을 했다. 줄리엣 비노쉬는...명불허전, 두 말 하면 입 아픔. 

- 마리아에 대해 쓰느라고 발렌틴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해 아쉽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의외적(!)이다. 앞으로 좋은 작품에 더 많이 많이 나와서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줘야 할 배우다.

2014. 9. 22. 23:30

떠나고 잊어버리고, 빈 자리가 생기고 대체재가 필요해진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 깔려 있는 기본 정서는 이것인 듯했다. 모두가 고독감을 느꼈고, 그 고독은 그들 주변의 빈 자리를 정의했다. 영화는 파리의 한 평범한 동네를 배경으로 해 거기서 내내 거의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평범하고 작은 이 공간에서, 고독한 이들이 안고 있는 빈 자리들은 끊임없이 일상의 균열을 만들어 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후 두 번째로 접한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감성은 여전히 좋았다. 좋았던 지점은 궤를 같이 했다. 어떻게 보면 줄거리만 다를 뿐, 내러티브와 이를 풀어가는 방식, 연출기법 등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와 거의 흡사하다고 생각됐다. 예컨대 닫힌 유리창 너머로 인물들의 실루엣만 보여주되 말 소리는 들리지 않게 하는 방식, 또는 인물들이 대화 도중에 속으로 말을 삼키는 방식.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선 변화를 능동적으로 따라가게 하는 방식 말이다. 일상 속에 겹겹이 쌓여 있던 비밀과 오해의 서스펜스를 하나씩 해소해 나가는 섬세한 구조도 동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인물들은 감정을 삭히고 말을 줄이는 법을 알고 있다. 그의 영화는 갈등을 말로써 표현하기 보다, 인물들이 눌러 삼켜 끝내 내뱉지 못한 말로써 표현하는 부분이 훨씬 많은 영화다.  





이런 방식으로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는 뭘까. 그의 영화는 매번 이란 사람이라는 민족성이 이란 밖의 다른 나라를 지향하는 방향성과 충돌하는 어떤 지점을 다룬다. 이란 뿌리를 지닌 인물들은 늘 고향이 아닌 다른 곳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한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씨민은 이란을 떠나 이민을 가고 싶어한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 아미르는 파리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았지만 끝내 이란으로 되돌아갔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이란인들은 늘 머무름과 떠남의 경계에서 방랑한다. 그리고 ‘떠남’이란 필연적으로 이별을 수반하기에, 이들의 일상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동이 발생한다. 특히 가족 안에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가족 관계를 통해 한 개인의 존재를 성찰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내러티브는 비슷했으나 이번에는 개인을 성찰하는 방식이 좀 더 확장된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도 부녀지간, 모녀지간 등 가족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아울러 마리(베레니스 베조)와 새 남자친구 사미르(타하르 라힘)와의 관계, 마리와 전남편 아마드(알리 모사파)와의 관계, 사미르와 전 부인과의 관계 등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에서 파생되는 고독과 외로움도 큰 축을 이룬다. 인물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떠나고 다시 들어오고, 그러면서 계속 빈 공간이 생겨난다. 이를 메우기 위한 몸부림도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진실은,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한 곳에 끝까지 머물러 줄 수는 없으리란 것이다. 자기 자신 말고는 삶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없고, 고독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외로워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절망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존재를 갈구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실패할 것을 알더라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고, 그것은 처연하지만 동시에 무척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든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리다. 생명력이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인물들은 늘 크고 작은 일상의 파동에 흔들리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그것을 감당해내고 또 하루가 지나면 담담히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따뜻한 느낌을 전한다. 소박하고 잔잔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2014. 9. 22. 22:55

<비긴 어게인(2014), 존 카니>은 뉴욕이라는 큰 도시에 덩그러니 쓸쓸하게 남겨진 이들을 쫓아간다. 뉴욕의 뮤지션들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2014), 조엘 코엔>과 흡사하다. 하지만 <인사이드 르윈>이 현실을 좀더 보여줬다면 <비긴 어게인>은 꿈을 보여주기를 택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 각자의 시선 차이일 수도 있고, 대중성을 위한 전략일 수도 있겠다. 





두 영화를 비교해 보자면, 뮤지션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삭)는 실패의 캐릭터다. 한겨울 젖은 신발을 신고 동상에 걸릴 지경에 처하면서 겨우 찾아간 기획사에서도 뺀지를 먹을 정도다. 영화 주인공치고는 반전 한 번 없이, 일관성있게 안 풀린다. 한때 잘나갔던 시절이 있었고 음악성도 인정받고 있지만, 한마디로 ‘뜨지’ 않는 거다. 매일 눈 뜨면 대충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지면 또 친구 집 소파에 빌붙어 하룻밤을 나는 피로한 일상만이 반복된다. 반면에 <비긴 어게인>의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우연과 행운의 기운을 만나 바닥에서 위로 올라간다. 실력을 갖춘 르윈에게 딱 한 가지 결여됐던 게 있었다면 바로 이 우연과 운이었다. 르윈의 현실에서 우연이나 운은 행여 꿈에서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 결과 르윈의 얼굴에는 허탈하고 공허한 표정만 남았다. 그렇지만 행운을 거머쥔 그레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와 자존감이 되돌아왔다.





<비긴 어게인>이 다양성 영화 치고 250만 관객을 찍으며 선전하고 있다. 역대 다양성 영화 중 흥행 2위를 기록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영화 속의 음악들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보여줘서다. 이 영화는 인생 막장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어떤 에너지 같은 것들을 긍정하고 있다. 실패하고 낙담한 이에게도 찾아와 주는 따뜻한 기운의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긍정의 태도는 음악에 버무려져서 보다 긴밀하게 전달된다.





<인사이드 르윈>은 정반대로 힘을 빼는 영화다. 보는 사람 어깨도 르윈의 것처럼 축 처지게 할만큼, 르윈은 측은하다. 분명히 음악적으로는 재능을 갖췄기에 더 안타깝다. 재주도 열정도 있지만 도통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거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혼자 힘만으로 더이상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의 경지가 절절히 와닿는다. 그 세계 안으로 입성할 수 있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아무리 밖에서 노래하고 소리쳐 봐야 들어줄 이가 없다는 것.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우리들에게, 세계는 르윈이 바라보는 곳과 더 흡사하지 않을까 싶다.

그레타의 뉴욕은 실연의 와중에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곳이었다. 배경도 따스한 색감을 내뿜는 가을의 뉴욕이다. 르윈의 뉴욕은 그보다 비루하고 허무한 곳이었다. 계절은 뼛속까지 얼어붙게 하는 쓸쓸한 겨울이다. 이들의 처지는 이렇게나 다르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보고난 뒤에는 위안을 느끼게 해준다. 노래하며 웃는 그레타와 반주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벅차오른다. 르윈이 이따금 우스운 꼴로 세상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터져나온다. 전자는 희망과 기쁨 같은 것들에 대한 ‘동경’의 웃음이다. 반면에 후자는 ‘연민’의 웃음이다. 마치 자학 몸개그를 시연하는 코미디언을 보고 불쌍해 하면서도, 웃는게 미안하다 느끼면서도 웃음을 터뜨리는 것과 같은 류의 웃음 말이다. 좋은 것들은 언제 봐도 좋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 손 안에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예쁘고 아름다운 것, 긍정적인 기운을 내뿜는 이야기들을 마주하면 더 감격하고, 부러워하고, 원하게 된다. 하지만 나의 것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르윈에 투영돼 있던 연민과 공허함이었다. 그래서 르윈을 보면서는 미안한 위로를 받았다.

2014. 9. 2. 20:44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판타지’ 영화였다. 그것도 슬프면서 아름다운 동화였다. 영화 내용은 사실상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한 모금 마시면 정신줄을 놓고 과거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차(tea)가 있다거나, 평범한 공동주택의 방 안에 정원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기이하긴 하나 아예 비현실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상상과 환상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잠시 현실에서 발을 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냥 동화가 아니라 ‘잔혹 동화’다. 영화를 보기 전 홍보카피나 포스터만 보고 이 영화가 무지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류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오해’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포스터부터 일러스트처럼 귀여웠으니까.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느긋했던 마음은 바짝 긴장. 첫 장면부터 웬 남성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다가오더니 관객을 향해 목젖이 보일만큼 괴성을 지른다. 주인공 폴(귀욤 고익스)은 눈가가 시뻘개서 만사 피곤에 쩔어 보이고, 그의 이모들은 언제나 소름끼칠만큼 빈틈없는 쌍둥이 룩(look)을 고수한다. 현실은 현실인데 여기저기 조금씩 삐딱하게 뒤틀려있다. 그냥 평범한 동화가 아니었던 거다.





드디어 프루스트 부인(앤 르니)의 정원이 공개된다. 헌데 이 정원, 보기만 해도 예쁜 디저트의 달달한 향이 풍겨올 것만 같은 그런 꽃밭과는 거리가 멀다. 한 뙈기밖에 안될 질척거리는 흙밭에 정체모를 식물들이 자라는 요상한 곳이다. 심지어 이 흙밭이 가꿔지는 장소는 도심 속 공동 아파트의 방 안. 볕 안 드는 두더지굴 같은 곳에서 식물을 키우느라 방 안 곳곳에는 괴기스럽게 햇빛 반사용 거울을 설치해놨다. ‘마담’이나 ‘정원’에 어울릴만한 고상한 장식품 대신 일관성 없는 취향의 박제 동물 머리나 불상 따위만 가득하다. 말하자면 이 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자기 집 안에 ‘마약 재배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차저차하여 이제 신용하기 살짝 꺼림직한 이곳에서 기억 여행이 펼쳐진다.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기억을 불러일으킬 음악을 틀고 차 한 모금에 마들렌 한 입을 베어무는 순간, 이 비밀한 공간은 거꾸로 흐르는 몇십 년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프루스트 부인의 정원에서 내가 오늘, 지금 이 순간 알고 있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은 마치 골동품 가게처럼, 흘러간 마음과 가려져 있는 진실을 먼지 구덩이에서 꺼내 올리는 그런 곳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때로 잠자고 있던 아름다운 추억을 만나고, 때로 영원히 지우고 싶었던 아픈 기억을 맞닥뜨린다. 이들의 무의식 속 여행을 함께하다 보면, 시각적인 감상을 넘어서 어디선가 시큼비릿 쌉쌀한(?) 정체모를 풀냄새가 코끝에 끼쳐오는 것만 같다.



폴도 결국 기억 속에 묻어두고 외면하려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그와 화해한다. 평생 이모들이 설계한 대로 인생을 살아왔던 폴은 이제 자신이 피아노를 사랑하는 이유가 이모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서 참가한 콩쿨에서, 폴은 마치 눈 앞의 세계가 산산이 ‘깨지는 것 같이’ 환각적이고 폭발적인 연주를 해낸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매듭이 풀릴 때는 위기도 겪는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딛고 일어선다. 폴에게 있어서 과거와 마주하는 것은 곧 잃었던 자기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이 주는 메시지는 심플하다. 자신의 과거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 지나온 세월을 원망하는 사람들, 그리고 과거와 화해하지 못해 앞으로도 뒤로도 발을 내딛지 못하고 쳇바퀴 돌리듯이 오늘만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능동적인 형태의 ‘힐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약(?) 탄 차와 마들렌이라는 판타지적인 소재를 통해 이를 심플하게 가능케 한다.  





여기까지는 동화적이다. 허나 영화가 내포하는 의미는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프루스트 부인의 정원에서는 30유로만 내면 기억 여행을 떠날 수 있겠지만, 어디 현실에서야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기가 쉬운 일일까. 하물며 영화 속에서도 이를 이루지 못한채 주변인이 돼버린 사람들을 보여준다(예컨대 폴의 아빠 친구). 바꿔 말하면, 영화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마약 탄 차와 마들렌이라는 우연적이고 판타지적인 매개체가 없이는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 볼 기회를 얻기 힘들다는 얘기다. 또 과거를 마주하는데 성공한다 해도, 그 결과가 해피엔딩이란 보장은 없다. 기억을 불러내는 과정과 결과는 심지어 괴롭고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과거를 돌이켜보기로 결심했다면, 후폭풍도 본인이 감당할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화해하는 과정은 종종 외롭고 후회스러울지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도 이따금 쉽게 히스테릭해지고, 피폐해지고, 집착적으로 변한다. 이들 모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계가 얼마나 분열적이며 화해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화해나 치유 같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삶 속에 가려져 있는 어둠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시청각, 후각을 다채롭게 만족시키는 이 환상같은 영화가, 종종 슬프고 잔혹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2014. 8. 22. 21:48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모스트 원티드 맨(2014), 안톤 코르빈>. 역시 존 르 카레의 소설이 원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토마스 알프레드슨>를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파이 영화’라고 하면 보통 치밀한 두뇌싸움, 화려한 액션, 동시대의 최첨단 기술 같은 것들이 등장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티켓파워도 기본은 먹고 들어간다. 007부터 미션임파서블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첩보 영화들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첩보’에 대한 환상을 재생산 해왔다. 그러한 환상은 다시 흥행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됐다.

하지만 <모스트 원티드 맨>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두 영화는 ‘거품 뺀 첩보’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원작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설의 분위기와 연관이 깊지 않을까 싶다. 각각 독일 함부르크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두 영화는 상당히 ‘황량’하다. 으레 ‘볼거리’라고 불리는, 오감을 자극하는 화려한 액션씬이나 각 잡힌 작전은 없다. 1초의 빈틈도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능력을 갖춘 천상천하 유아독존 유형의 영웅도 당연히 없다.






중심 인물들은 능력이 있을지언정 조직 내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다. 한때는 실력으로 인정 받았을 테지만 정치에 재능이 없었던 탓이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정보부 국장 군터 바흐만(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이제 너댓명 밖에 안되는 조직원들을 데리고 후진 사무실에서 일한다. 최첨단 장비 대신 가위로 직접 신문기사를 오려가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정보부 부국장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도 마찬가지다. 조지는 상사의 헛발질 때문에 엉겁결에 정보부(서커스)에서 동반 해고된다. 해고된 그에게 성가신 일을 뒷처리하라는 비밀 임무가 주어지지만, 사무실도 없어서 호텔방을 전전하면서 어렵사리 정보를 모아야 한다. 둘 다 조직 내에선 리더이며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이들에게서 제임스 본드나 이단 헌트가 풍기던 ‘만능 스파이’의 매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민첩하긴 커녕 주로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기만 한다. (심지어 이들은 민첩하게 움직이기엔 너무 뚱뚱하거나 나이 들었다.) 손에는 비밀 장비나 무기 대신 담배가 들려있고, 교통 수단은 최첨단 스포츠카가 아니라 낡은 자가용이다.

그런데 ‘스파이’들로부터 풍부한 자원과 화려한 액션을 빼앗고 나니까 오히려 기민한 ‘판단력’이 오롯이 남았다. 군터와 조지는 시종일관 고민하고 고뇌하고 황량한 거리를 제 발로 천천히 걸으며 이동한다. 매순간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의 시선에는 엄숙함이 서려있다. 그 시선들을 따라가며 느끼는 긴장감은 평소에 주먹이 내리꽂히는 곳을 눈으로 바쁘게 쫓으며 느꼈던 시각적인 긴장감과 출처가 다른 것이었다. 






기존의 첩보 영화에서 ‘비밀 정보’란 으레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었다. 상대방과의 게임에서 먼저 취해야 할 값비싼 대상이자 목적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스트 원티드 맨>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정보를 둘러싼 게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두 영화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정보를 찾는 일련의 과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팩트를 하나씩 취합해가는 과정 속엔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 뒤따르는 책임 같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 군터는 정보원들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조지는 가까운 동료가 임무 수행으로 죽거나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도, 사랑하는 아내가 떠나도 말을 아낀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구절절한 배경 설명, 덧붙일 변명 따위는 없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이들이 현실 앞에서 조금씩 더 늙어간다고 느꼈다.

이 두 편의 이야기는 스파이를 소재로 하지 않았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냉전 전후 정보 싸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어도, 그들이 찾는 대상이 정보가 아니었어도 이야기가 발견하고자 한 지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아서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이쪽과 저쪽, 가치와 의무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들의 표정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테러 조직이나 이중첩자에 대한 진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게 느껴진다. 다만 냉정한 현실을 어깨 위에 짊어진 중년 인간의 외로움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 고인이 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마지막 연기는 역시 ‘완벽’이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이 그의 유작이 된 것이 너무도 아쉽다. 그의 연기를 앞으로도 몇번이고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 게리 올드만의 영화 연기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인 것 같다. 움직임은 최소화 돼있고 대사도 많지 않은데, 그저 ‘가만히’ 있는 연기만으로도 분위기를 지배한다. 너무 놀라워서 영화를 계속 돌려보게 된다.

#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 정보부 MI6에서 일했었고, 필명으로 글을 쓰다가 소설가로 전업했다.

2014. 8. 15. 17:19

# 영화를 본 뒤, 피해자, 가해자, 죄인, 희생자의 개념에 대해 다시 고민해 봤다. 보통 가해자=죄인, 피해자=희생자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가해자가 곧 죄인과 동격이 되지 않기도 하는 곳이 ‘사람 사는 곳’인가 보다. 어쩌면 상식이라는 건 실체가 없는,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을 보는 우리의 믿음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공주의 전 학교 선생님은 영화 초반, 중국집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공주야, 너 잘못 안한 거 다 알아. 근데 그게 아니야”.

잘못이란 말에 얼어붙은 공주 앞에서, 선생님은 짬뽕을 후루룩 먹으며 또 말한다.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고, 사람 사는 데서는 잘못 했다고 죄인이고 잘못 안했다고 아닌게 아니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잘못을 했는데 죄인이 아니고 잘못을 안했는데 안 한게 아니라니. 이건 무슨 부조리일까.

논리에도 맞지 않는 이 말이 영화 내내 맴돈다. 그리고 끝내는 이 부조리가 완벽히 이해된다. 그 점이 참으로 슬펐다.




# 공주에 대한 직접적 가해자가 아닌 주변 인물들도 부조리의 한가운데 놓여 있긴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어머니, 공주 엄마, 편의점 김사장, 동윤이, 새로 전학간 학교의 친구들...이들의 무신경한 언사, 무관심, 침묵 또는 지나친 호의는 그대로 공주에게 생채기가 됐다. 아마 이들 행동의 대상이 공주 아닌 다른 아이였다면 그저 약간의 관심 혹은 무관심에 그쳤을 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를 간신히 방어하고 있던 공주에겐 날카로운 비수가 됐다. 주변 사람들은 공주가 겪어온 일련의 과정을 몰랐다. 공주가 남들보다 더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무지가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공주가 받은 상처는 현실로 남았고, 주변 인물들은 비자발적 공범자가 됐다.

공주를 성적으로 유린한 인물들은 철저한 자각과 의도를 갖고 가해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의 법칙이 뭔지, 그들은 죄인이 되지 않았다. 공주 주변에서 2차적으로 공주에게 상처를 입힌 인물들은 애초에 그럴 의도와 자각마저 없었기 때문에 죄인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공주의 상처를 책임지는 사람은 공주 말고는 아무도 없게 됐다. 세상의 법칙이 부조리였다. 






# (결말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렇게 ‘사람 사는 곳’에서 죄와 죄의 출처가 모호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세상의 지독함은 결국 공주를 막다른 길로 몰아 넣었고, 난 영화를 몇번이나 돌려봤다. 솔직히 공주가 결국 구원받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공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일상을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썼고 그런 공주를 너무나도 응원하고 싶지만, 그녀의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에 공주가 강물에 몸을 던진 뒤 서서히 헤엄치는 장면은 일종의 열린 결말이다. ‘물에 빠지면 죽어서, 마지막 순간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던 공주가 죽지 않고 힘차게 헤엄쳐 나오는 희망적인 결말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공주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물살에 휩쓸려 가는 게 그녀의 마지막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수진 감독은 시나리오에서부터 공주가 살아남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결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공주가 떠내려간 게 끝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논리와 이성, 시스템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는 어두운 심연-선의와 악의가 끝 모를 듯 모호해지는 이 엄청난 곳에서 공주를 구원할 수 있는 게 오로지 그녀 본인의 생명력 뿐이라면 그것 역시 너무나 처절해서다. 영화 엔딩에 깔린, 공주의 25m 풀장 완주를 응원하는 듯한 함성 소리를 나 또한 공주에게 보내주고 싶었지만...상처 입은 자를 아무도 보듬어 주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 치유마저도 당사자 혼자 죽을 힘을 다해야 겨우 얻어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그녀가 이런 현실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더 자유로워지길 바랐던 것 같다.

2014. 8. 15. 01:40

# 여름 휴가철이 됐다. 다들 지난 해 휴가가 끝나자마자 계획에 착수했던 올해의 휴가지로 떠난다. 누구는 런던, 누구는 바르셀로나, 누구는 뉴욕...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은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내는 황홀한 시간들로 가득해졌다. 문득 잠 안 오는 밤 그 황홀함을 방 구석에서나마 공유하고 싶어졌다. 내가 보고 싶은 뉴욕을 보기 위해 아주 오래 전에 봤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꺼내 들었다. 




불을 끈 어두운 방안에 오드리 햅번의 황홀한 뉴욕이 펼쳐진다. 다시금 왜 <가십걸>의 블레어가 그렇게 <티파니...>의 오드리 햅번에 ‘빙의’하려고 애썼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인격체가 또 있을까. 그녀의 뉴욕은 또 왜 이리 달콤한가. 그런 와중에 그곳의 현실은 또 어찌 그리 현실적인지.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위안을 얻는다. 언제 봐도 꿀잼인 영화. 


2014. 7. 21. 16:16

언제부터였던가. 아마도 스무 살을 갓 넘긴 20대 초반부터 였던 것 같다. 가족으로부터 자립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삶을 꾸려나가는 인생을 남몰래 동경하게 된 것이. 

아마 내 경우에는 스무 살을 넘겨서도 여전히 가족의 그늘 아래 살고 있고 당분간도 그 그늘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위안을 포기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부모가 넘쳐나게 갖고 있어서 자식들에게도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면, 그 풍족한 환경은 그것대로 부러울 터다. 하지만 진정으로 내 부러움을 산 건 일찌감치 부모로부터 떨어져 자신만의 살을 개척한 이들이었다. 그 부러움은 내가 온전히 갖지 못하는 일종의 '용기'에 대한 것이었다. 



프란시스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삶을 꾸려 나가는 젊은이 중 하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삶은 뜻대로 굴러가는 게 도무지 없다. 모든 일은 사사건건 타이밍이 어긋난다. 예컨대 룸메이트가 갑자기 방을 빼서 집세에 쪼들리게 되고, 견습단원으로 있는 무용단에서는 약속했던 자리를 줄 수 없게 됐다고 하고, 그 때문에 다음달부터 또 집세가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삶이 거지같이 굴러가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다가 팔자에 없이 분수에 넘치는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카드빚만 떠안게 되는 식이다. 연애운은 늘 ASKY(안생겨요. 'undatable'). 상당히 심신이 지치는 일상이다. 



그녀 삶이 순조롭지 않은 데는 무엇보다도 영 요령 없고 계획성 없는 그녀 성품 탓도 크다. 거기다가 주변 사람들 앞에서는 앓는 소리로 도움은 못받을 망정 괜한 자존심만 부리느라 감정을 축내고 (얼마 남지도 않은) 재산을 축낸다. 전형적으로 대책 없고, 눈치 없으며,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행동하는 철부지 감정파 인간형이다. 그녀를 두고 '사랑스럽다'라고 표현하는 홍보 카피가 많았다. 난 그녀가 사랑스럽기 보다는 그녀의 태생적 덤벙댐과 눈치 없음, 대책 없음에 종종 답답 터지고 짜증이 났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러워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자립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만큼 나는 그들과 달리 그럴만한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란 것도 인식했다. 그 자립이란 단순히 나이 먹고도 부모에게 의지하는 캥거루족만 모면하는 수준을 넘어서, 온전히 자기 스스로의 것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의미였다. 나는 언제나 대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안전장치가 없으면 불안해했고 미지, 미비의 세계로 발을 내딛기 무서워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빈틈이 나타날까봐 늘 걱정했다. 

하지만 어떤 류의 사람들은 대안을 마련해두지 않고도 우선 발을 뻗어보고 본다. 도박이고 모험일 수 있다. 하지만 설사 실패하더라도 어찌됐든 그것으로 자립은 시작한 셈이 된다. 프란시스는 과히 찌질하게 살고 있지만, 그녀의 빈틈투성이 삶은 오히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한다.


- 나만의 것을 찾아나간다는 것은 삭막한 도시에서의 홀로서기 가운데 나를 보호해줄 어떤 소중한 것을 찾아나간다는 의미인 것 같다. 

- 오프닝과 클로징 삽입곡이 매우 좋았다. 

- 프란시스가 삽질하는 장면마다 터지는 웃음은 나도 갖고 있는 허술함을 향한 일종의 허탈함이었다 ㅎ 


2014. 7. 19. 00:20

두려운 것, 두려워해야 할 것들의 목록은 어쩌면 오래 전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목록에 들어있는 것들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다. 이를테면 죽음 같은.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들은 두려워하기엔 너무 사소하거나 별것 아닌 일로 규정되곤 한다. 


<멜랑콜리아>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고, 우울증에 관한 영화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더랬다. 병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에게는 남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진다. 그녀는 그래서 종종 쌩뚱맞은 상황에 무너지는데, 예컨대 자신의 결혼식 같은 때다.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 같은 '보통' 사람들은 통념상의 '일상적 범주' 내에서는 두려움이나 꺼림직함 등의 감정을 잘 콘트롤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통념상 그 범주를 벗어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두려움에 떤다. 저스틴은 반대다. 결혼식 하나 끝내는데도 극도의 두려움과 신경증적 불안에 휩싸이던 그녀는 오히려 지구를 향해 행성이 날아오는 '비일상적' 상황 앞에서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들을 사회적으로 규정화하는 작업이 없었더라면, 저스틴처럼 일상을 두려워 하고 비일상은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 기행으로 간주될 필요도 없어진다. 우울증이 '사회적' 병리 현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멜랑콜리아>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모호한 곳에서 찾아오는 우울감을 한 번이라도 맛봤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가끔 이유 없이 느껴지는 우울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대다수의 우리들. 우울해 해도 될 것, 안될 것들을 재고 따지다가 결국 우울감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해 만성 체증에 시달리는 우리들. 두려운 것을 마음껏 두려워하지 못한 채 자기 검열에만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조금 조롱하기도 하고, 또 측은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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