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사한 현대식 고층건물 옆에 멋대가리 없는 저층 시멘트 건물. 고풍스럽고 우아한 유럽식 건축물 옆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주택.
# 시멘트 건물 외벽의 아무렇게나 갈라진 틈새 사이로 쌩뚱맞게 자라나는 도시형 야생 식물들. 마치 아스팔트 틈 사이로 민들레가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듯, 식물이 자라날 이유가 없는 곳에서 피어나는 풀 포기들.
# 발코니가 있는 건물 정면도, 베란다와 창문이 있는 뒷면도 아닌 건물 ‘옆면(측면)’. 아무 쓸모도 없이 미관상 추레하기만 한 존재.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은 제목과 달리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 주는 느낌처럼 달콤한 영화도 아니다. 그보다는 '도시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영화다. 영화에 삽입된 세 가지 은유로 주제는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예컨대 요즘의 삶이란 근사한 건물 옆 초라한 주택처럼 일관성도 기준도 없다는 것. 갈라진 시멘트 틈 사이로 머리를 들이미는 식물들처럼 때로는 쌩뚱맞고 때로는 끈질기다는 것. 그리고 건물의 벽(옆면)이 오로지 너와 나의 구획을 나누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도시의 삶은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
영화는 주인공인 마리아나(피욜라 로페즈 드 아야라)와 마틴(하비에르 드롤라스)의 건조한 도시 생활을 러닝타임 1시간 30여분 내내 보여주며 이 세 가지 은유를 충실히 뒷받침 한다. 뚜렷한 스토리라인 없이 그저 이들 각자의 하루+하루+하루...가 계속된다. 표정은 우울하다. 대다수의 도시 생활자들이 그러하듯. 둘 다 미약한 정도의 불면증, 신경증, 우울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깨어나고, 쇼윈도 디자인을 하고, 웹 디자인을 하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고, 가끔 데이트를 하고, 인터넷 채팅을 하며 그럭저럭 큰 문제 없이 살아간다.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운 회색의 도시에서 참으로 전형적으로 살아간다.
1시간 20여분 정도의 러닝타임까지는 이 같은 무미건조 감성이 일관성 있게 지속된다. 도시 생활의 진수(?)를 잘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생각됐다. 굵직한 스토리라인 없이 생활감각만으로 영화를 진행시킬 줄 아는 일본영화스러운 감성도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두 남녀 주인공의 약간 쩔어있는 듯한 그 눈빛도 큰 몫을 하고. 위에 언급한, 영화에 삽입된 세 가지 은유는 슬라이드 형식의 스틸샷으로 표현되어 감각적이면서도 명쾌하다. 인터넷 등 현대 문명이 오히려 인간 소외를 증폭시켰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살짝 얹혀 영화를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앞서 중간중간 두 남녀가 언젠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질 것 같다는 복선이 주어지긴 했지만서도, 마지막에 이렇게 대뜸 이들이 맺어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결말은 개연성이 없었다. 애초 끝나기 직전까지 이 영화를 주인공 남녀가 ‘서로’를 찾아 헤매는 영화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는 영화로 봤기 때문이었다. 삶의 공백 때문에 외로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뼈저리게 공감했던 건, 나 역시 그들처럼 이 도시 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돼서였다.
영화에 스토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인과관계를 구구절절 짜맞추는 스토리는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지 설득하지 못하는 장면은 과도하게 설득하려고 드는 스토리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다 . 두 남녀가 각자 집의 외벽을 뚫어서 낸 창문 밖으로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 장면 등은 아름다웠다. 영화 전반을 감싸고 있는 특유의 감성과 소박하면서도 감각적인 연출은 돋보였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결말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 원제는 Medianeras(측벽, 옆벽. Sidewalls)다. 소외를 말하려고 했던 원제가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웬 로코물처럼 변해 버린데에 심심한 위로를...
- 여주인공인 마리아나가 무지 아름답다.
- 신과 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들쑥날쑥, 영화 속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풍경은 여러모로 서울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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