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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스마리아'에 해당되는 글 1건
2014. 12. 22. 17:36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딱 지금 이 순간까지 쌓인 ‘과거’일 것이라는. 만약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또 1시간, 하루, 1년이 더해진다면 딱 그만큼의 설명이 내 인생에 덧붙여질 것이다.


내게 이 영화는 전적으로 마리아(줄리엣 비노쉬)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조앤(클로이 모레츠)의 비중 및 무게감이 결코 뒤지지 않는데도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이야기는, 마리아가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에서 젊은 여비서 시그리드에게 반하는 중년 여성 헬레나를 끝내 어떻게 연기해내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상의 여배우 마리아는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헬레나 역을 맡게 된다. 하지만 20여년 전 그녀는 같은 연극의 시그리드 역할로 데뷔를 했었다. 이제 그녀는 나이가 들어 극 중 헬레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고 사회적 지위도 갖춘 헬레나와 현실의 마리아는 마치 거울을 보듯 흡사하다. 이들이 일궈낸 것들은 당장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시간을 들여 갈고 닦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있다. 그런 헬레나가 고작 한 여자 아이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저버린다. 한 순간에 우습고 유치한 꼴로 전락한다. 마리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위스 실스마리아의 산 속에서 연극 연습을 하면서도 마리아는 계속 대사를 잊어

버리거나 씬에 동의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헬레나의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마리아를 물심양면 보좌하는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이 있다. 그녀는 젊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아직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설명할만한 퍼즐 조각들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 발렌틴에게 삶이란 아직 ‘저 앞에 놓여있는 무언가’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부딪쳐도 봐야 한다. 예컨대 썸 타는 사진가가 꾸준히 만나볼만큼 괜찮은 남자인지도, 토 나올만큼 구불구불한 산 속 안갯길을 달려가 만나보고서 판단해야 된다. 아직 그녀는 그러고 싶은 나이인 것이다.





이 둘의 방향이 영화 내내 계속 엇갈린다. 중년의 마리아는 계속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반면에 발렌틴은 세상의 방식을 기다린다. 그러다 보니 이 둘은 사소한 일로 계속 충돌한다. 연극 연습 장면을 보고 있다 보면 발렌틴이 시그리드가 되고 마리아는 헬레나가 된다. 또 발렌틴은 지나간 과거 언젠가의 마리아를 재생하기도 한다. 인물과 시점은 한데 뒤섞이고, 영화는 매우 재미있는 리듬감을 갖춘다.





‘이 연극 때려 치우겠다’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마리아는 결국 헬레나를 연기할 수 있을 까?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마리아가 종국에 헬레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깨달음의 계기를 후반부에 두 번 마련했다.


첫 번째는 발렌틴이 말로야 언덕에서 안개처럼 갑자기 마리아의 곁을 떠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1차로 마리아 삶의 관성이 깨지게 된다. 하지만 마리아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마리아는 발렌틴의 빈 자리로 인한 공허함이나 변화를 추호도 느끼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하던 대로의 일상을 이어나간다. 새 비서를 고용하고 연극 출연도 그만두지 않는다.

두 번째 계기가 온다. 연극 개막을 앞둔 며칠 전 리허설에서, 영화는 마리아를 결정적으로 가격한다. 시그리드 역을 맡은 조앤에게 “이 장면에서 헬레나가 시그리드보다 몇 초라도 더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가 말 그대로 ‘개무시’를 당하게 만든 것이다. 우월함과 기품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은 오히려 더 극적으로 그녀를 우습게 보이게 만든다. (그 교묘한 뉘앙스와 분위기를 연기한 줄리엣 비노쉬는 최고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야 마리아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진다. 왜 발렌틴이 말로야 언덕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는지. 왜 헬레나를 연기하는 것이 그토록 역겹고 짜증났는지. 그녀는 지나간 자신의 시간 속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마리아는 헬레나를 받아들인다. 지난한 연습의 시간을 지나 이 지점에서 말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헬레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가 아예 헬레나를 이해하길 거부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영화는 끝이 난다. 난 엔딩 이후의 시간 속에서 마리아가 헬레나를 더할 나위 없이 잘 연기했으리라 믿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종 우리는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를 대신 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 영화 자체 내용만큼이나 여배우 3인방의 연기도 작품에 큰 몫을 했다. 줄리엣 비노쉬는...명불허전, 두 말 하면 입 아픔. 

- 마리아에 대해 쓰느라고 발렌틴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해 아쉽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의외적(!)이다. 앞으로 좋은 작품에 더 많이 많이 나와서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줘야 할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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