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모스트 원티드 맨(2014), 안톤 코르빈>. 역시 존 르 카레의 소설이 원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토마스 알프레드슨>를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파이 영화’라고 하면 보통 치밀한 두뇌싸움, 화려한 액션, 동시대의 최첨단 기술 같은 것들이 등장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티켓파워도 기본은 먹고 들어간다. 007부터 미션임파서블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첩보 영화들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첩보’에 대한 환상을 재생산 해왔다. 그러한 환상은 다시 흥행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됐다.
하지만 <모스트 원티드 맨>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두 영화는 ‘거품 뺀 첩보’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원작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설의 분위기와 연관이 깊지 않을까 싶다. 각각 독일 함부르크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두 영화는 상당히 ‘황량’하다. 으레 ‘볼거리’라고 불리는, 오감을 자극하는 화려한 액션씬이나 각 잡힌 작전은 없다. 1초의 빈틈도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능력을 갖춘 천상천하 유아독존 유형의 영웅도 당연히 없다.
중심 인물들은 능력이 있을지언정 조직 내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다. 한때는 실력으로 인정 받았을 테지만 정치에 재능이 없었던 탓이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정보부 국장 군터 바흐만(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이제 너댓명 밖에 안되는 조직원들을 데리고 후진 사무실에서 일한다. 최첨단 장비 대신 가위로 직접 신문기사를 오려가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정보부 부국장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만)도 마찬가지다. 조지는 상사의 헛발질 때문에 엉겁결에 정보부(서커스)에서 동반 해고된다. 해고된 그에게 성가신 일을 뒷처리하라는 비밀 임무가 주어지지만, 사무실도 없어서 호텔방을 전전하면서 어렵사리 정보를 모아야 한다. 둘 다 조직 내에선 리더이며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이들에게서 제임스 본드나 이단 헌트가 풍기던 ‘만능 스파이’의 매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민첩하긴 커녕 주로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기만 한다. (심지어 이들은 민첩하게 움직이기엔 너무 뚱뚱하거나 나이 들었다.) 손에는 비밀 장비나 무기 대신 담배가 들려있고, 교통 수단은 최첨단 스포츠카가 아니라 낡은 자가용이다.
그런데 ‘스파이’들로부터 풍부한 자원과 화려한 액션을 빼앗고 나니까 오히려 기민한 ‘판단력’이 오롯이 남았다. 군터와 조지는 시종일관 고민하고 고뇌하고 황량한 거리를 제 발로 천천히 걸으며 이동한다. 매순간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의 시선에는 엄숙함이 서려있다. 그 시선들을 따라가며 느끼는 긴장감은 평소에 주먹이 내리꽂히는 곳을 눈으로 바쁘게 쫓으며 느꼈던 시각적인 긴장감과 출처가 다른 것이었다.
기존의 첩보 영화에서 ‘비밀 정보’란 으레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었다. 상대방과의 게임에서 먼저 취해야 할 값비싼 대상이자 목적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스트 원티드 맨>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정보를 둘러싼 게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두 영화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정보를 찾는 일련의 과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팩트를 하나씩 취합해가는 과정 속엔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 뒤따르는 책임 같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 군터는 정보원들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조지는 가까운 동료가 임무 수행으로 죽거나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도, 사랑하는 아내가 떠나도 말을 아낀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구절절한 배경 설명, 덧붙일 변명 따위는 없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이들이 현실 앞에서 조금씩 더 늙어간다고 느꼈다.
이 두 편의 이야기는 스파이를 소재로 하지 않았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냉전 전후 정보 싸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어도, 그들이 찾는 대상이 정보가 아니었어도 이야기가 발견하고자 한 지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아서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이쪽과 저쪽, 가치와 의무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들의 표정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테러 조직이나 이중첩자에 대한 진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게 느껴진다. 다만 냉정한 현실을 어깨 위에 짊어진 중년 인간의 외로움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 고인이 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마지막 연기는 역시 ‘완벽’이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이 그의 유작이 된 것이 너무도 아쉽다. 그의 연기를 앞으로도 몇번이고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 게리 올드만의 영화 연기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인 것 같다. 움직임은 최소화 돼있고 대사도 많지 않은데, 그저 ‘가만히’ 있는 연기만으로도 분위기를 지배한다. 너무 놀라워서 영화를 계속 돌려보게 된다.
#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 정보부 MI6에서 일했었고, 필명으로 글을 쓰다가 소설가로 전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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