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aser(시저) is home”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끝났던 전편. 속편의 시작은 인류의 멸종 위기다. 전편에서 침팬지들을 대상으로 실험됐던 플루 병원체가 전세계로 퍼지면서 대부분의 인류가 죽었다.
그리하여 골든 게이트 브릿지(금문교)를 사이에 두고, 폐허가 된 샌프란시스코 도시와 울창한 숲 속에 각각 인간과 동물이 자리를 잡았다. 한 명의 리더, 그를 따르는 무리가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나름의 시스템을 갖추고 살아가는 상황. 인간과 동물, 동물과 인간을 병치시켜 보여주는 초반의 깔끔한 정리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일찌감치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단 시저는 특이한, 흔치 않은 존재다. 인간과 흡사하게 지능적이고 이성적이지만 '동물성'을 잃지 않는다는 데서 그렇다. 여기서 동물성이란 이미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욕심내지 않는 동물만의 특성이다(필요한 것 이상을 욕망하는 존재는 인간 뿐이라지). 2인자 코바는 동물인데도 결국 힘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순수성을 잃게 되지만, 시저는 일관성있게 동물성을 지켜낸다. 인간으로부터 얻은 지능은 오직 동물을 지키기 위해 활용한다. 한 마디로 그에게 '인간성(동물성의 대립적 의미로)'이란 어디까지나 후순위인 셈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옛 집(전편에 나온다)을 여전히 기억하고 선한 인간들을 ‘친구‘라고 부르지만, 시저에게 그것들은 끝내 집과 가족이 될 순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고 시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무릇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안락함에 대한 위협, 부에 대한 위협, 생존에 대한 위협. 이로 인한 두려움이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과도한 욕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 따라 더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자연과 인류의 싸움은 애초부터 시작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려워하는 존재이며 그래서 더 많은 걸, 모든 걸 필요로 하는 존재다.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유인원은 전기도 집도 필요로 하지 않아서 오히려 무서운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과 반대로, 우리는 필요한 것이 많아서 약한 존재다.
시저 말대로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자연의 가치를 멸시한 인간의 오만함은 현실 세계에서 이미 수백 수천년 전부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전쟁을 일으켜왔다. 플루가 인류를 멸종 위기에 몰아넣은 영화 속 사정은 대다수 재난영화의 플롯이 그러하듯, 이에 대한 경고성 은유다. 다만 이번에는 보통의 재난-히어로물과 아주 다르게도, 영웅이 없다. 오토봇도 엑스맨도 없다. 심지어 구원의 대상이 인류도 아니다.
인간을 닮은 동물, 동물을 닮은 인간의 이야기를 그리는 시리즈. “유인원이 인간보다 나은 줄 알았는데, 다를 바 없다”며 자기 존재의 본질에 대해 자괴하는 침팬지의 모습에서는 오히려 인간보다 우월한 어떤 차원이 느껴진다. 어쩌면 인간과 동물,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짓는 틀 자체에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번 편에서 인간들은 침팬지들보다 좀더 유창하게 언어를 사용하고, 음악을 듣고 즐길 줄 안다는 것 정도 말고는 딱히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한편 침팬지들은 자연의 원형 그대로라고 하기엔 상당히 진화(?)된 형태다. 다음 편에서는 이 존재들의 경계가 어떻게 더 허물어질지 궁금하다.
* 앤디 서키스의 눈동자 연기-눈빛 연기라고 하는 것만으론 그의 연기를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다-를 보면 왜 그가 모션캡처 연기의 최고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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