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떠나신 날..(1)
(11/18/2014)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만 하루. 호상이라고들 했다. 임종하실 것 같다고 해서 자식들이 모였고 그로부터 서너 시간 뒤에 주무시듯 숨이 다 하셨다고 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빈소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다만 장인어른인 할아버지와 많은 추억을 갖고 있는 이모부가 이따금 예배 중에 눈물지을 뿐이었다. 엄마와 이모, 외삼촌 모두 조문객들로부터 아버님이 편안히 가셔서 복이라는 위로의 인삿말을 들었다.
난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생전에 그리 가까워 본적 없었던 할아버지. 노년에는 한참을 아파서 병상에만 누워 계셨고 그리하여 내게는 관심 밖이었던 할아버지. 지난 여름 처음 찾아갔던 할아버지의 새 요양병원에서 얼굴을 뵌 게 설마 마지막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생각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난 그저 할아버지가 이제 언제든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그저 미뤄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그리고 이미 할아버지가 떠난 지금도 난 이별을 준비하고 이별에 대처하는데 참으로 미숙하고 게을렀다. 장례 첫날밤 아직 비어 있는 빈소에서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고도 난 할아버지에게 아무 인사도 건넬 수 없었다. 어려운 이별 앞에 서면 난 매번 이 모든 걸 그저 모른 척 건너 뛰어버리고 싶어하기만 하는 철없는 못난이가 돼 버리고 말았다. 손님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르면서 할아버지의 죽음은 자꾸 잊혀졌다. 할아버지의 존재가 더이상 이쪽 세계에 속해있지 않다는 사실은 와닿지가 않았다. 할아버지를 위해 차려진 빈소는 여전히 이쪽 세계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조우, 부딪치는 술잔 같은 것들로 분주하게 채워졌다.
둘째날 오후에는 할아버지의 입관이 예정돼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 감은 얼굴을 보게 되리라고 예감할 수 있었다. 요양병원으로부터 막 할아버지가 생전에 입으셨던 옷가지가 도착했다. 비닐봉지에 싸인 채 한 벌쯤 밖에 안되는 옷이. 마지막 그 날로부터 얼굴 한 번 더 못본 할아버지가 이 생의 흔적이라고 남겨 놓은 건 이게 전부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됐다. 지하에서 입관을 기다리는 할아버지는 깨끗한 수의를 입고 반듯이 누워계셨다. 눈을 감은 할아버지의 얼굴은 매끈매끈해 보였다. 얼굴 위에는 아프실 때 보이던, 깊게 패인 주름이나 고통스러운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왠지 가슴이 후련해졌다. 직접 마주하기 전에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기가 두렵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막상 당신의 얼굴을 보니, 이것은 이별이라는 걸 홀가분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다는 걸. 슬퍼할 자격도, 슬픔에 참여할 조금의 지분도 없을 만큼 염치가 없는 마음에 할아버지를 못 보내고 있었다는 걸.
할아버지를 보내는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만져 보았다. 마지막 기도를 끝내며 할아버지에게,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이모부의 목소리에는 어디서도 다시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랑과 감사와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제 엄마에게 가, 라고 말하는 외삼촌과, 제일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며 할아버지 귓가에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이는 이모의 모습에 나도 이따금 눈물이 솟았다. 하지만 난 이번에 끝까지 울지 않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표정을 본 느낌 그대로, 어쩐지 할아버지를 후련하게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정신 없이 손님을 맞이하는 장례 이틀째 저녁을 보냈다. 오는 이들마다 호상이라 그런지 빈소 분위기가 좋다고 한 마디씩 보탰다. 사촌들은 십여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고 서로가 반가웠다. 마지막 뵀던 여름의 그날, 푸르른 창밖을 머리 맡에 두시고도 뒤척이기조차 힘들어 외롭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가시는 날은 그래도 그렇게 잔칫날 같았다. 마치 17년 전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분당의 외갓집에 일가친척이 다 모여 떠들썩하던 그 때 기분이었다. 그 때 할아버지는 어린 우리를 공원에도 데리고 다니시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고, 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놀러가는 건 서울 토박이인 내게 유일무이한 고향의 경험이었다.
손님이 다 떠난 빈소에 그 때처럼 온 식구가 나란히 이불을 깔고 누워 쪽잠을 청했다. 할아버지 영정이 우리를 굽어봤다. 난 그제야 할아버지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았다. 모두들 꽃을 내려놓았지만, 난 어쩐지 오늘만큼은 할아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 한 송이 꽃을 영정 곁에 가만히 세워뒀다. 이제 할아버지도 아주아주 가끔은 할머니와 함께 내 꿈에 오시겠지.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오랫동안 할아버지에게 사과하고 싶다.